실외기

2019년 8월은 2017년의 8월보다 조금 덜 더웠다. 이 나라의 많은 인간들이 2019년 5월동안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전염병이었다. 뉴스에서 그랬다. 내 주위 사람들도 많이 죽어버렸다. 모두 다 전염병이랬다. 그 병은 감기처럼 시작해서 그냥 죽어버렸다. 몇 년전 유행했던 조류독감보다 훨씬 더 고통은 덜했지만 치료약이 없었다. 전염병이라는 사람이 생명의 스위치를 탁 하고 꺼버리는 것처럼 일순간에 정지해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니 사람들은 타인들과의 접촉을 상당히 꺼려했고 국가적으로도 최소한의 활동들만을 제외하곤 모두 각자의 집에서 격리되어 지내는 것을 의무화하였다. 집 밖으로 나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때마다 우주에 나가기 위해 입는 옷들처럼 새하얀 방역복을 입은 공무원들에게 신분을 확인하고 몸 전체를 소독해야만 했다. 소독도 역시 흰색 가건물에서 이루어졌다. 문을 들어가기 전부터 눈을 감은 상태에서 소독이 이루어졌기에 안의 구조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른다. 가끔 우발적으로 눈을 떠버리는 사람들이 있기에 아예 고글을 하고 들어가도록 하였다. 고글의 양 쪽 유리에는 흰색으로 코팅이 되어 있었기에 눈을 뜬다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안쪽에서 보는 흰색은 그림자때문에 약간 더러워 보였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버린 것이 2019년 8월의 더위가 한층 나아진것에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그 원인을 제공한 것은 맞다. 직접적인 원인은 에어컨의 사용이 급격히 줄었기 때문이었다. 죽어버린 사람들의 수에 반비례하여 에어컨의 사용은 줄어들었다. 그 
뿐이 아니다. 실제로는 에어컨이 있어도 틀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전염병이 공기에 의해 균을 옮긴다는 뉴스의 속보가 뜬 뒤 부터였다. 에어컨이 돌지 않으니 실외기에서 나오는 뜨거운 바람도 없어졌다. 그만큼 거리의 공기를 데우던 열기가 사라졌다. 사라져버린 것은 열기만이 아니었다. 물론 눈에 띄게 사라진 것은 거리의 사람들이었지만 그것을 제외하자면, 소음이 줄었다. 이것도 역시 실외기가 돌지 않으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유머의 실종 건조실

유머가 사라졌다. 유머가 사라지면서 침묵이 길어졌다. 행복하지만 행복해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나의 유머는 나를 낮추는 것이었다. 내가 봐도 나는 키가 작고 두꺼비를 닮았다. 얼굴에 난 여드름은 사춘기를 지나면서 울긋불긋함을 넘어 새파란 생감자같은 색으로 진화해냈고, 나는 그들에게 종속당했다. 머리카락은 정수리를 중심으로 조금씩 훤해지면서 안면보다 뽀얀 피부를 수줍게 드러내고 있다. 코는 또 어떠한가. 돼지껍데기를 들러붙인것처럼 두껍고 냄새가 날것 같이 기름져있고, 그 기름은 티끌만한 날파리가 잠시 휴식을 취하고자 내려앉는다면 잠시라는 시간을 영원으로 만들어 버릴만큼 진득해 보인다. 땀구멍은 어찌나 넓은지 바늘 세 개를 풍덩 빠트릴 수 있을것 같으며, 콧망울은, 아빠가 나의 외모에 대해 이야기할 때 항상 먼저 이야기하던 그 자랑스런 콧망울은 교통사고를 당해 수술을 하고 난 후에 오른쪽 구멍이 왼쪽 구멍보다 반정도나 작아져 버렸다. 눈 밑은 이끼가 서식하는 음지처럼 그늘져 있었고, 이끼대신 15년째 다래끼 다섯개가 불규칙하게 돋아있었다. 다래끼는 하얗고 다래끼를 제외한 다른 곳은 검거나 갈색이거나 붉었다. 어떻게든 재료를 아끼며 만든 만두처럼 귀는 관자놀이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거울을 볼 때마다 거울 안에 손을 집어넣어서 목을 조르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나의 얼굴이 어느 등급인지는 정확하게 판단하긴 어렵지만 아무리 높게 잡아도 중간은 커녕 중간의 중간도 겨우 손이 닿을까 말까 한것은 확실했다. 42년간 단 한번도 이성과 교제한 적이 없었다. 나의 성생활은 자위를 하거나 몸을 팔아 밥을 먹는 사람들에게 나의 거구를 얹어주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런 얼굴로 사는 것은 싫다. 내 얼굴이 싫다는 것은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시골에서 자란 탓에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올라가도 반아이들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나의 별명은 학창시절 내내 두꺼비의 변형어들이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나는 흉측한 얼굴을 달고 탄생했고, 여자애들은 그런 나를 혐오했다. 사람 마음을 어떻게 그리 쉽게 아느냐고 말하지 않길 바란다. 눈빛만 보아도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내가 있는 이 공간에서 같이있는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게 되면 최소한 배타적으로 대하게 된다면 그 마음은 사물로 전이되어 나를 공격한다. 엉뚱하게 양동이를 발로 차 넘어뜨리거나, 스르륵 잘만 열리던 창문이 내가 열때면 고막을 긁는 소리를 내며 열린다거나, 혹은 바지의 쟈크가 내려가 있다거나. 참 이상한 일이지만 정말로 조심하지 않으면 수도 없이 그런 황당하고 멍청하다라고밖에 보일 수 없는 일들을 저지르게 되고, 그 일들은 또 다음 일들의 초석이 되어 나를 짜장면처럼 말아버린다. 그리고 어느 순간 후루룩! 누군가의 목구멍으로 씹히지도 않고 고속직행하게 되는 것이다. 고속직행이라고 하니까 잠깐 이야기하자면 어릴때 나의 꿈은 외계인을 만나보는 것이었다. 두꺼비인간치고는 꽤나 보편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 뻔하여 반아이들에게 그 사실을 말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한번은 용기를 내어 친구들이 꿈에 대해 소박하고 낭랑하게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말을 슬쩍 흘려본적이 있었지만 목소리가 너무 작았는지 아무도 듣지 못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목구멍으로 들어간 자들의 패턴이다. 분명 나의 목소리는 작지 않았다. 최소한 옆사람에게는 들릴만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나 스스로 '내 목소리가 작았구나.' 하고 반성한다. 그리고 그 뒤엔 '다음엔 더 크게 이야기해봐야지.'다짐까지 해버리면서. 실제로는 안한다. 절대로 안한다. 만약에 다시 한번 누군가에게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려는 용기를 가지고 있다면, 그 용기는 조만간 썩어버린다. 물론 용기를 가지고 있는 것 자체를 나쁘다고 말할수는 없다. 역사적으로 감행해버린 그 모든 용감한 행동들을 과연 누가 비난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린 그 용기들에게 빚을 지고 살고 있는데. 하지만 어떤 날엔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런 생각이 드는 날은 기념일이 아니다. 기념일이 지난지 8일정도 됐다거나, 아님 방 안의 테레비가 갑자기 어떤 인력을 못 이기고 출처모를 소리를 내며, 그 소리를 어설프게나마 흉내내보자면 '뜩.' 하고 1미리의 10분의 1을 움직이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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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많은 행동들에게 용기란 완전히 불필요한 거추장스런 명분이다. 물질이라는 것은 연쇄작용의 결과이자 원인이어서 이게 결과인지 원인인지를 따지는 것은 상당히 소모적인 논쟁이다. 그게 왜 그런건지 생각하기 시작하다보면 이미 죽고 죽어 골백번 고쳐죽은 아들놈의 부랄을 손아귀 안에서 굴려대며 깨트릴까 말까 슬며시 입꼬리가 올라가는 일이다. 그러니까 용기라는 것도 원인이 될 수 없으며 단지 하나의 명분에 불과한 것이다. 행동이라는 것은 명분과는 다르게 순수한 결정체 같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용기인지 만용인지 선행인지 악행인지 농담인지 진담인지에 대한 모든 가능성들을 열어두고 있다. 그 모든 가능성들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행동이라는 것은 끝이 없이 이어져 있고 결국에는 그 모든 가능성들과 다시 한번 조우하여 술잔을 돌리거나 칼날을 돌리거나 하는 일들이 생기지만 그것도 결국에는 누군가가 나중에 붙여버린 것들이어서 행동이란 것은 용기라는 작은 마음이 절대로 건드릴 수 없는 것이다. 용기를 치켜세우는 많은 인간들에게는 미안한 말이고, 나 또한 어떤 용기들은 숭고하다 생각한다. 하지만 그 숭고함 뒤로 어딘가 아쉽다. 그 아쉬움을 지켜보는 것은 정말로 힘든 일이지만 오늘은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날이다. 나는 아직도 어린지, 아직도 외계인이 가끔 보고 싶다. 이게 나의 유머였다. 흉측한 얼굴로 태어나서 42년을 살아버린 내가 할 수 있는 유머란 나를 낮추면서 괜히 귀여운 소리를 한번 해보는 것. 개그맨들이 잘 한다. 그런 유머를. 개그맨들이 잘 하니까 개그맨이 아닌 사람들도 그런 식으로 유머를 한다. 나를 낮추는 것은 욕 먹을 만한 일이 아니다. 그러기에 일단 그 부분에서 점수를 따고 들어간다. 거기에다 외모와는 다르게 귀여움이 있는 말을 수줍게와 당당하게 사이의 톤으로 나직이 말한다. 콩트에서 자주 사용되는 톤이다. 그것이 포인트다. 그럼 남자들이 나를 슬쩍 봐준다. 안 봐주는 이도 있다. 하지만 최소한 봐주는 이가 가끔 있다. 점점 더 그 유머를 더 많이 사용했다. 외계인을 넘어서 마카롱이라던가하는 말들을 써가며 원래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단지 유머를 위해서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들에게 나를 종속시켰다. 다행히도 내 주변 사람들이 늙어갈수록 내 얼굴의 흉측함은 등급의 가운데를 향해 조금씩이나마 기어가고 있는 듯 했고, 그럴수록 더욱 더 열심히 나를 종속시켰다. 

어느날부터인가 시들해졌다. 잠깐 웃어주는 그 순간 말고는 나의 유머는 너무 쉽게 증발해버렸다. 결국 여자들은 말없이 있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붙인다거나 아님 그 자리를 그냥 떠나버렸다. 그게 너무 슬펐다. 나는 왜 인기가 없을까. 라는 질문은 나에겐 너무 때지난 자문이었다. 난 너무 못난 면상을 가지고 태어나버렸다. 

43살이 되었을 때 정확히 딱 잘라서 며칠부터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 유머를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의식적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서서히 그렇게 되었다. 서서히 서서히. 서희라는 이름의 반아이가 있었다. 하늘은 얄궂다. 서희는 나의 반대어였다. 나를 좋아한다는 것은 반남자들의 추한 농담이었고, 서희를 좋아한다는 것은 어딘가 모를 청춘영화의 냄새가 짙게 베어있었다. 청춘영화는 너무나 아름다운 애절한 청춘들에게만 카메라를 고정하기 때문에 나는 청춘영화의 시절이 담아내는 청춘을 건너뛰어 버렸다. 유머는 사라졌지만 남자를 만나고 싶다는 나의 욕망은 아쉽게도 너무나 건재했다. 번 돈의 30프로는 유흥업소에 출입하는 것으로 썼다. 그 사람들은 나를 싫어하지 않았다. 실은 누구보다 나를 싫어할 수도 있겠지만 그 행동들의 명분보다는 행동 자체에 집중하는 것이 더 올바른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생각하는 것도 행동의 분류에 속하여 본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그 남자들이 실제로는 나를 파충류라고 생각하면서 대하고 있지만 실제로 눈에 보이는 것은 사람인 것처럼 그렇다면 그 사람들은 나를 싫어하는 것일까. 좋아하는 것일까. 그 사람들이야 어쨌든간에 나는 그 사람들을 좋아한다. 내가 돈이 없으면 그 사람들은 나를 싫어한다. 그 사람들은 내가 아니라 나의 돈을 좋아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돈을 얻기 위해서 나를 좋아해야 하는 것이라면 나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 좋아한다는 것은 마음일까. 행동일까. 행동이란 원인이면서 결과이기 때문에 무엇 때문에 그렇게 행동한다는 것은 또 다른 원인이 될 수 있는 것일까. 나를 좋아하는 행동을 하는 것이 원인이 된다면 그 결과는 그녀가 돈을 버는 것이다. 돈을 벌면 그녀에게 좋은 것이기에 그녀는 결국 나를 좋아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나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겠지. 나같은 사람들을 좋아하는 것일테지. 나같이 못난 사람들을 좋아하는 것일테지. 그러니 나는 그 남자를 좋아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실제로 나는 그 남자들을 좋아하는 편이다. 나는 그 남자들 앞에서 나의 유머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 유머는 솔직히 말하자면 너무 병신같고, 한번 그 유머를 사용하고 나면 양치를 하고 싶어진다. 그러니 그 유머를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을 좋아할 수 밖에 없다. 그들 앞에서는 나는 편하게 말하게 된다. 이 이상은 말하기가 어렵다. 그만큼 나에겐 나를 판단하고 무언가를 가려주는 판사가 아닌 순수하게 나의 이야기를 내가 이야기를 하는 행동을 듣고 보아줄 만한 이가 없다. 난 너무 흉측하게 태어나서 생각하는 것도 너무 흉측하다. 그런 나를 오롯이 받아들일수만은 없지만 최소한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이상 정화된 흉측한 생각들 정도는 감히 누군가와 나누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런 날은 특징이 없는 날들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특징이 없는 날들이 그런 날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그 순간에 잠시 어떤 것이 빛나거나 어둠에 잠겨 있을 때 그런 날이 되는 것이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특별한 날이다. 

2017. 6. 13

작년부터였던것 같다. 젊은이들이 자신의 무기력함을 대놓고 광고하기 다녔던 것이. sns상에 그런 트윗들이 올라올 때마다 나는 기분이 이상했다. 좋으면서도 싫었다.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자신의 삶에 충실하지 않은것이 창피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하는 의문이었다. 그런 말들이 선한 얼굴이 그려진 가면을 쓴 악마인 것 같았다. 나 또한 아주 게으른 인간 중의 하나임이 분명하니. 그들의 게으름을 뭐라 나무랄 수는 없는 것이지만 난 항상 그것이 부끄러웠다. 감추고 싶고 어쩔 수 없이 드러났을 땐 최소한의 핑계로 무마해보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그들은 스스로를 자랑스러워 했다. 나는 게으르다는 것을. 누가 뭐라해도 나는 지금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하고 있다는 것을 광고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러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들 또한 많이 불안할 것이다. 일단 돈이 없으면, 그러니까 자기 나이대의 다른 많은 사람들보다 돈이 없으면 불안해지기 마련이다. 아닌 사람도 있다. 그 사람들은 돈이 아닌 다른 것들로 돈을 대처하고 있다. 최소한의 자급자곡이라던가. 친구에게 무한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넉살이라던가 하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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